ARTIST STATEMENT
Mariah Lee is a Korean-born artist currently based in Korea, having previously lived and worked in Melbourne. She earned her BFA from the Victorian College of the Arts at the University of Melbourne in 2013.
Her practice investigates the inner structure of the human psyche in the post-emotional era through a refined visual language. By dismantling emotional expression and attuning to the rhythms of silence, she evokes the fundamental grain of existence and a sense of ethical resonance. Working across drawing, installation, and video, she gives form to invisible psychological landscapes. Her work is a sustained practice of thought—she pares away emotional excess through creative destruction, and through creative return, she reclaims an ethics of being, striving to re-sense the center in an age in which it has been lost.
이마리아 작가는 한국 출신으로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멜버른에 거주하며 작업했다. 2013년 호주 멜버른 대학교 예술 대학(Victorian College of the Arts)에서 BFA를 마쳤다.
그녀의 작업은 감정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내면의 구조를 시각적 언어로 탐색한다. 감정의 해체와 침묵의 리듬을 통해 존재의 본래 결(結)과 윤리적 감응을 환기하며, 드로잉·설치·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비가시적 심리 풍경을 조형화한다. 그녀의 작업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 감정의 과잉을 걷어내고, ‘창조적 귀환’을 통해 중심 없는 시대 속 존재의 윤리를 다시 감각하려는 사유의 실천이다.
현대인들은 산업자본주의적 시대를 걸쳐 외형적으로 물질적 풍요로움이 중요시 되는 환경에서 자신의 솔직한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기보다 사회가 요구하는 형식에 맞추어 감정을 절제하며 살아간다.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 여겨지며,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현대인의 삶의 형태는 본인이 추구하는 삶이 아닌, 타인이 추구하는 삶으로 왜곡 되며, 감정들 또한 본인이 아닌 타인을 기준으로 비춰지는 모습에 중점이 맞춰지고 있다.
감정의 자율성이 배제된 채, 긍정적인 사고체계만이 강요되는 사회적 질서 안에서 ‘과연 우리는 진정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지속적으로 화자 돼야 한다고 생각 한다. 현재 우리의 모습이 진실한 모습인지 아닌지에 대해 그리고 내면 깊이 결여 되어있는 것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면 성찰이 필요하다.
내면 성찰이야 말로 삶을 진정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시도라 생각한다. 남에게 비춰지는 모습이 아닌, 본인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경험을 직시하고, 직면하고, 제대로 인식할 수 있어야 타인과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말이다.
타인에게 의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쾌락만을 선호하고 고통, 슬픔, 혐오 등과 같은 불쾌에 관한 이야기를 부정하는 습관은 결코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데 큰 결점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선이 있어 악이 있고, 악이 있어 선이 있다고 말하듯이 우리들의 삶은 자연스레 일종의 흑과 백과 같은 두 가지의 형태로 나뉘며, 상황에 따라 조화를 이루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렇다 해서 불쾌에 관한 본질적인 감정이 우선시 돼야 한다는 것이 아닌, 부정적인 감정들이 아름다운 삶을 사는 데 있어 방해요소가 아닌, 상상이상의 행복감과 성취감을 줄 수 있는 잠재적 요소라는 것을 말한다. 때론 어둠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어둠으로 인해서 빛은 더 환하고 밝게 비춰지기 마련인 것처럼, 어둠과 빛은 상대적인 동시에 서로를 보완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요소들이다. 둘 중 하나의 요소가 비중을 과하게 차지하게 되는 순간, 조화의 아름다움은 사라지며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처럼 우리 내면의 속성 또한 적절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면 깊이 존재하는 갖가지 감정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사고하고 인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감정들이 공포, 불안, 두려움과 같은 불쾌한 것들 일지라도 말이다. 진실한 모습을 숨기는 것이 나를 방어하는 수단이 되기보다는 온전히 나를 드러냄으로써 외부의 강압적인 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진정한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다.
그리고 익숙함에 안주하는 삶이 아닌 익숙함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고, 불편한 것에서 익숙함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삶의 양상을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편함에서 편안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두려움에서 행복으로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들로부터 긍정적인 감정을 더 유연하게 끌어내는 것이 가능할 때 얻어지는 정신적 쾌락이야 말로 최고의 행복이며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사람들이 꺼려하는 불쾌에 관한 것들인 삶과 죽음, 공포, 두려움, 불안, 압박, 속박 등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어둡고 불쾌에 속하는 것들을 연구하고 표현하기로 했다.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드러나질 수 있도록 말이다. 불쾌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행복 또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환상적 이상을 심어주듯이, 우리의 삶이 희로애락을 거쳐야 하는 과정 속에서 고통스런 순간도 결국엔 죽음 앞에서는 지나가는 아름다운 순간이자 추억으로 말이다.
이마리아 작가노트 v.2.0
CRITIQUE
심리적 공간, <몽상의 방>에 들다
박남희(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교육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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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지만 때론 기억하려 해도 망각하기도 하고, 잊어버리려 해도 뚜렷한 장면이 각인되듯 알 수 없는 신경계의 고리들이 작동에 영향 받는다. 현실과 유관한 단서를 갖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꿈의 이미지나 정서는 감정적 혹은 생리적 자극과 상당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신경망의 그림자일 수 있다. 다만 상대적으로 이같은 꿈이 꾸어질 수 있기도 하고 꾸어진 것조차 알 수 없는 사실이 되기도 하는 것은 개인 간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작가 이마리아는 꿈과의 관계망에 놓인 특별한 존재이다. 작가에게 꿈은 유년기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육체적 질병의 경험 나아가 이를 극복하는 것에 이르는 모든 심리적 경험의 총체이다. 작가의 말처럼, “꿈은 두려운 현상의 실체이자 고통의 원인인건 사실이지만, 이러한 고통들이 내게 두려움만을 준 것은 아니었다.” 즉 고통으로부터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고귀한 정신적 행복에 이르는 원천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작업 <몽상의 방>(2016)은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실제로 체험 가능한 공간으로 실현하고자 계획되었다. 흥미롭게도, 작가의 작업은 2미터 60센치의 큐브공간에서 영상과 사운드를 통해 꿈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자신만의 심리적 경험을 전이하게 할 특별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작가는 꿈의 파편이나 이미지를 갖지 않은 채 자신이 경험한 불쾌함이나 공포감 혹은 낯선 두려움 등을 갖도록 목적한다. 프로이트의 ‘언캐니’의 그것과도 같은 것일 수 있다.
작가는 이를 위한 중요한 조형적 장치로 빛과 어둠 그리고 그리드적 구조를 선택하고 있다. 단선적인 구조와 표면으로 일관된 사각의 방은 관람자에게 양쪽으로 선택된 어느 루트를 통해서도 중심의 벽을 마주하도록 하는데, 이 양쪽은 짝패처럼 동일한 크기와 구조를 갖는다. 마치 꿈과 현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 선과 악과 같은 서로 반대항처럼 보이지만 서로를 존재케 하는 의미항인 것처럼 말이다.
이 같은 구조는 꿈의 세부에서 오는 갖가지 요소들 보다는 그것들이 만들어냈던 공포나 심리적 압박을 느끼게 하고자 의도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작업은 작가의 심리적 내면을 추체험하는 것 일수도 있다. 이는 작가의 내면에서 꿈과의 관계항에서 비롯된 공포와 극복의 팽팽한 긴장구조를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유년기 심리적 공포나 육체적 질병을 가져다 준 꿈의 세계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이로 인한 심리적 고통이나 현실에서의 영향은 심리적, 물리적 쇠약함을 경험함은 물론이고, 공포나 좌절까지도 경험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죽음에 대한 예지몽은 극도로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으며 이것이 병적 징후로 드러나고 다시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생기기까지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였다. 그 모든 상태를, 특히 예지몽을 꾸는 자신을 부정이 아닌 용인함으로써 작가는 일상처럼 꿈꾸는 일을 맞이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심리적 안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작가가 꿈꾸는 일을 받아들이는 개인적 상황 속에서 스스로에게 부여된 어둠, 질병, 좌절, 공포와 같은 부정적 심리적 작용을 다시 빛, 치유, 희망, 안정으로 이르게 하는 심리적 변화를 보게 된다. 작가의 <몽상의 방>은 자신의 일체의 경험이 용융된 객관화된 심리적 추체험의 구조로 독해된다. 자신의 심리적 징후와 극복의 공간이자, 이에 대한 근원적인 토대로서의 꿈과 현실의 경계를 객관화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모든 심리적, 물리적 체험은 오히려 큐브를 통해 객관적 실체로 드러남으로써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함을 안다. 적어도 작가는 스스로 맞이한 내면의 긴장과 공포의 단면들을 시각적 구조물을 통해 표출함으로써 용인을 넘어 자기이해의 과정을 충분히 여과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삶의 파토스적 에너지가 아니라 에로스적 욕망이 강하게 작가 내면에 일렁이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독백과 같은 심리적 추체험의 큐브는 내면의 긴장을 넘어서 안정으로 가는 그 길목에 있음을 충분히 가시화하고 있다.